[교황님강론]
2022년 주님 봉헌 축일 미사 교황 프란치스코 강론
+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 30)
수녀님 & 자매님들 늦었지만, 축성생활의 날을 축하드리며,
교황님의 주님 봉헌 축일 미사 강론을 올립니다.
※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직역, 의역, 오역 3종 선물세트를 함께 드립니다. ^^;;
(피드백 열렬히 환영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언제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기쁘고, 복되고, 거룩한 축성 생활을 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
주님 봉헌 축일
제26회 세계 축성 생활의 날
봉헌 생활회와 사도 생활단 회원들과 함께하는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
성 베드로 성당, 2022년 2월 2일
두 장로인 시메온과 한나는 성전에서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 : 메시아의 오심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시메온이 하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그는 성령에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아기 예수님의 구원을 보고 마침내 그를 자신의 품에 안습니다 (루카 2,26-28 참조). 우리는 이 세 가지 행동을 단순하게 고려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특히 축성 생활을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첫째,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할까요?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27절)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이 장면의 주인공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시메온의 마음을 하느님을 향한 갈망으로 타오르게 합니다. 성령은 마음속에 기대를 살아있게 합니다 : 그는 그에게 성전에 가도록 재촉하고 비록 가련한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 메시아를 그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 그는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위대한 일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힘의 과시에서가 아닌 비천하고 연약함에서 분별할 수 있게 하십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그곳에서도 비천함과 연약함, 그러나 또한 극적인 것 : 하느님의 힘을 발견합니다. “성령에 이끌려” 라는 말은 영성 신학에서 “영적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 안에서 인식하는 영혼의 움직임이며,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위해 시험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내적인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또한 누가 우리를 가장 많이 움직이게 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성령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영입니까? 이 질문은 모든 사람 특히 축성된 사람들이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이 우리로 하여금 아기의 비천함과 연약함에서 하느님을 보도록 인도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결과, 목표 그리고 성공의 측면에서만 우리의 축성을 보는 위험이 있습니다 : 우리는 영향력, 가시성, 숫자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유혹입니다. 반면에 영은 이것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매일의 충실함을 기르고,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길 바라십니다. 시메온과 한나가 보여준 충실성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가고, 시간이 흘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매일 지켜보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낙심이나 불평 없이 기대 속에서 삶을 살아가며, 충실함 안에서 인내하며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불을 붙이신 희망의 불꽃을 키웁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시대를 움직이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랑이 우리를 계속해서 나아가게 합니까? 그것은 성령입니까? 아니면 순간의 열정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입니까? 우리는 교회와 사회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때로는 선행의 겉모습 뒤에 나르시시즘의 병폐나 눈에 띄고 싶은 욕구가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우리가 많은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종교 공동체들은 성령께 열정적으로 열려있기 보다는 기계적인 되풀이 - 그저 바쁘게 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것 - 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축성 생활의 쇄신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거기에서 생기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내적 동기를 살펴보고 영적 움직임을 분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 우리의 눈은 무엇을 보는가? 성령에게 이끌린 시메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0절). 이것은 믿음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 그것은 눈을 뜨게하고, 시선을 바꾸고, 관점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많은 만남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자비로운 시선에서 우리 마음의 완고함을 부드럽게 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셔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주시는 데서 믿음이 탄생합니다. 우리 자신, 다른 이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상황, 심지어 가장 고통스러운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방법입니다. 이 시선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입니다. 순진한 시선은 현실을 도피하고 문제들을 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지적인 시선은 “안을 들여다보고”, “저 너머”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겉모습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의 그 틈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분별하기 위한 시선입니다.
연로한 시메온의 눈은 세월이 흘러 흐려졌을지라도 주님을 봅니다. 그들은 구원을 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각자는 물어볼 수 있습니다 : 우리의 눈은 무엇을 보는가? 우리의 축성 생활에 대한 비전은 어떻습니까? 세상은 자주 그것을 “낭비”로 봅니다 : “훌륭한 젊은이가 수사나 수녀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아깝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못생겼다면…그렇지만 아깝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은 아마도 그것을 과거의 유물, 쓸모없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 남녀 신앙인들은 무엇을 봅니까?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갈망하며 단지 내면으로만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안과 밖을 모두 바라보는 선견지명이 있는 믿음의 시선이 될 수 있습니까? 바라보는 것의 지혜를 가지고 - 이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 그것들을 잘 보고, 원근법으로 보고, 현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저는 눈이 밝고, 계속해서 미소를 지으며 이런 방식으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이 든 축성된 남녀들을 볼 때 크게 교화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이를 위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그들의 눈은 희망과 미래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근래에 우리는 연로한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보고, 이야기하고, 질문하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듣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좋은 약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가 축성 생활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키우도록 청하는 표징을 반드시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할 필요가 있지만, 성령의 빛과 그의 움직임에 유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징을 못 본척하고 평소처럼 늘 하던 대로 똑같은 오래된 일을 하고, 관성을 통해 변화의 두려움에 마비된 채로 과거의 형태에 표류하여 되돌아갑니다. 저는 이것을 반복해서 말해왔습니다 : 오늘날 안전을 위해, 두려움 때문에, 창립자의 카리스마 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되돌아가려는 유혹…그것은 유혹입니다. 되돌아가서 “전통”을 엄격하게 지키고 싶은 유혹. 이것을 머릿속에 새겨둡시다 : 엄격함은 도착이며 모든 형태의 엄격함 아래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시메온도 한나도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로웠고, 축하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 시메온은 주님을 찬양하고 용기를 내어 아기의 어머니에게 예언합니다. 한나는 좋은 노파처럼 계속 말했습니다 : “그들을 봐요!” , “이것 좀 봐요!”. 그녀는 기쁨으로 말하였고, 그녀의 눈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과거의 관성도 없고, 엄격함도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뜹시다 : 영이 우리의 위기와 우리의 수가 감소하고 있는 위기 속에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역자 : 또는 신부님), 거기에는 사명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 끝까지 가서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새롭게 하기 위해 우리의 힘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우리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용기와 두려움 없이 우리의 마음을 엽시다. 우리는 시메온과 한나를 보아야 합니다 : 그들은 나이가 많았지만 돌아오지 않는 과거를 애도하며 나날을 보내지 않고, 대신에 그들 앞에 펼쳐진 미래를 끌어안았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어제를 되돌아보거나 오지 않을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낭비하지 맙시다; 그 대신에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서 흠숭하며, 선을 볼 수 있는 눈과 하느님의 길을 분별하는 눈을 청합시다. 우리가 그분께 청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주실 것입니다. 기쁨과 용기와 두려움 없이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우리의 품에 안고 있습니까? 시메온은 예수님을 그의 팔로 안았습니다 (28절 참조). 이것은 복음에서 의미심장하고, 유일무이하며,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안는 것이 믿음의 핵심이고,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은 우리의 팔에 안으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방향을 잃거나, 수천 가지 다른 일들에 휘말리며,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에 뛰어드는 위험을 무릅쓰지만, 모든 것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을 우리 삶의 주님으로 껴안습니다.
시메온이 예수님을 품에 안았을 때, 그는 축복과 찬미와 놀라움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축성 생활을 한 우리는 놀랄 수 있는 능력을 잃었습니까? 우리에게 아직 이 능력이 있습니까? 이것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살펴보고, 만일 그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메온과 한나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또는 그녀로 하여금 성전과 같이 감춰졌던 우리 안에 하느님이 행하시는 놀라움 앞에서 놀라움의 은총을 구합시다. 축성된 남녀가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말이 부족하고, 기쁨이 부족하고, 열정이 부족하고, 형제의 삶이 그저 따분하고, 놀라움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누군가나 다른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진정한 이유는 우리의 팔이 더 이상 예수님을 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성된 남자나 여자의 팔이 예수님을 껴안지 않을 때, 그들은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공백을 껴안지만 그것은 공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팔에 예수님을 안으십시오 : 이것이 표징이요, 여정이며, 쇄신을 위한 비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팔에 안지 못할 때, 우리 마음은 비통함의 먹이가 됩니다. 비통한 신앙인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에 대해 불평 합니다 : 선배, 그들의 형제, 자매들, 공동체, 음식…그들은 불평할 무언가를 위해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흠숭하고 품으며, 선을 볼 줄 아는 눈과 하느님의 길을 분별하는 눈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 팔을 벌려 그리스도를 포용한다면, 우리는 또한 다른 이들을 신뢰와 겸손으로 포용할 것입니다. 그러면 갈등이 번지지 않고, 의견 차이가 갈라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품위를 손상시키려는 유혹이 극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두 팔을 벌립시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오늘 우리의 축성을 기쁘게 새롭게 합시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무엇을 “움직이는지” 우리 스스로 물어보고, 어떤 새로운 비전을 키우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우리 팔에 품읍시다. 때때로 우리가 피로와 권태를 경험할지라도 - 이 또한 일어납니다 - 우리는 시메온과 한나가 한 것처럼 합시다.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주님의 신실하심을 기다렸고, 그분과의 만남의 기쁨을 스스로 빼앗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만남의 기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 이것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다시 중심에 두고, 기쁨으로 전진합시다. 아멘.
이탈리아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22/documents/20220202_omelia-vitaconsacrata.html
영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2/documents/20220202_omelia-vitaconsacrat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