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강론]
2021년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밤) 미사 교종 프란치스코 강론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영어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어와 내용이 다를 수 있지만,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오역이 제~법 있습니다. 미흡하지만,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탄을 축하드리며, 다가오는 2022년도 주님과 함께 으쌰으쌰 걸어보아요! ^^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밤)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
성베드로 성당, 2021년 12월 24일.
어둠 속에서 빛이 빛났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영광이 목동들 주위를 비추고, 마침내 수세기동안 기다려 온 메시지를 들려주었습니다 :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루카 2,11). 천사는 계속해서 놀라운 어떤 말을 합니다. 그는 목동들에게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느님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말해줍니다 :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2절). 그것은 표징입니다. : 한 아기, 구유의 엄청난 가난에 누워있는 아기. 밝은 빛이나 천사의 합창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오직 한 아기. 이사야가 예언했던 것처럼 :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이사 9,5) 다른 것은 없습니다.
복음은 이 대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의 인구조사를 명령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시작되는 예수님의 탄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 그것은 로마 초대 황제의 모든 위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후에 그것은 우리를 베들레헴으로 데려가고, 그곳에는 전혀 위엄이 없습니다 : 단지 포대기에 쌓인 가난한 아기와 목동들이 서있을 뿐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이 비천하게 계신 곳입니다.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하느님은 위엄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셨고, 자기 자신을 비천하게 낮추셨습니다. 비천함은 그분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우리 마음을 울리고, 우리를 구하고, 정말로 중요한 것으로 우리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택하신 길입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구유 앞에 서서 모든 예쁜 조명들과 장식들 너머에 있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묵상을 합니다. 우리는 아기를 묵상합니다. 그의 비천함 속에 하느님이 온전히 현존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 “아기 예수여, 당신은 하느님이시고, 아기가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에 놀라도록 합시다. 세상을 품으신 분은 다른 이의 품에 안길 필요가 있습니다. 태양을 만드신 분을 따듯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화된 온유함은 애지중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한한 사랑에는 부드럽게 뛰는 작은 심장이 있습니다. 영원한 말씀은 말을 못하는 아기, “젖먹이”입니다. 생명의 빵은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창조주는 집이 없으십니다. 오늘, 모든 것이 뒤집혀야합니다 : 하느님은 비천함 속에서 세상에 오십니다. 그의 위엄은 작은 것에서 나타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 우리가 하느님의 일하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성탄의 도전입니다 :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남자와 여자는 이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눈에서 자기 자신을 비천하게 하는 반면에 우리는 아마도 그의 이름으로 세상의 위엄을 계속해서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낮추려고 하지만 우리는 위대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우리 가운데 보이지 않는 목동들을 찾으시고, 우리는 보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보여 지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태어나셨고, 우리는 성공을 추구하며 일생을 보냅니다. 하느님은 힘과 권능을 찾지 않으십니다; 그는 온유한 사랑과 내면의 비천함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탄에 예수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 비천함의 은총. “주님, 저희에게 비천함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비천함이 진정한 위대함에 이르는 길임을 저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구체적으로 비천함을 수용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하느님이 우리 삶의 작은 것들에 들어오시길 원하신다는 걸 믿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일상생활, 집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매일 하는 일들에 거주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의 가운데 그는 비범한 일을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의 말씀은 엄청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작은 것들을 재발견하고 가치 있게 여기라고 당부하십니다. 만약 그분이 그곳에 계신다면, 우리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위엄을 갈망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불평들과 우울한 표정들, 그리고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욕심을 제쳐 놓아야 합니다! 그 어린아이의 비천함과 경탄 : 그것이 메시지입니다.
아직 더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 삶의 작은 것들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비천함에도 오길 원하십니다 : 힘이 없고, 노쇠하고, 부적절하고, 아마도 “엉터리”라고 느끼는 경험에서 말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베들레헴에서처럼, 밤의 어둠이 당신을 압도하고, 차가운 무관심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거나, 내면의 상처가 “당신은 소중하지 않다; 당신은 가치가 없다; 당신은 결코 원하는대로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외친다면, 오늘 밤, 당신이 이런 감정이라면 하느님은 응답하십니다. 그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너의 비천함이 나를 겁먹게 하지 않고, 너의 결점이 나를 곤란하게 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위해 작아졌다. 너의 하느님이 되기 위해, 나는 너의 형제가 되었다. 사랑하는 형제여, 사랑하는 자매여, 나를 두려워하지 마라. 내게서 어느 정도 너의 위대함을 찾아라. 나는 너에게서 가까이 있고, 내가 부탁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 나를 믿고 너의 마음을 내게 열어라”.
비천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작은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 곧 우리 형제와 자매들 중에 가장 작은 자들까지 하는 것입니다. 가난 속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가장 닮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분이 존경받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습니다. 이 사랑의 밤에 우리는 오직 하나의 두려움만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고, 우리의 무관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여 그분을 상처 입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언젠가는 그들이 우리를 천국으로 반가이 맞아줄 것입니다. 한 시인은 :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디킨슨. 에밀리 엘리자베스, 시, P96-17) 라고 썼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잃지 맙시다; 이제부터 우리가 예수님을 돌보고, 어려운 이들을 어루만져 주어야합니다. 이는 그분이 자기 자신을 그들 안에서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구유를 바라보며,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바로 그 작은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음을 봅니다. 목동들이요. 그들은 가장 단순하고 주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발견한 것은 그들이 들판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루카 2,8)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그곳에 일하러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시간표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양 떼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장소와 방식에 따라 살 수 없었고, 그들이 돌보는 양들의 필요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 그들과 가깝고, 잊혀진 주변 사람들과 가까웠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존엄성이 시험받는 곳에 오셨습니다. 그는 소외된 사람들을 고귀하게 하기 위해 오셨고, 먼저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교육을 받은 중요한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근로자들에게 말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밤 노동의 궁핍함을 품위 있게 채우기 위해 채우러 오십니다. 그는 노동을 통해 남자와 여자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노동 그 자체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인간은 노동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날에 우리는 반복해야 합니다 : 직장에서 더 이상의 죽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헌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유를 마지막으로 바라볼 때, 멀리서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여행하는 동방박사들을 언뜻 봅니다. 우리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 주위에 모든 것이 함께 모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목동들뿐만 아니라 학식 있는 이들, 부자들 그리고 동방박사들도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에는 부자와 가난한 이, 동방박사처럼 경배하는 이, 그리고 목동들처럼 일하는 이들이 한데 모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이 중심에 계실 때 통일이 됩니다 :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신앙의 본질, 우리의 첫사랑, 경배와 자선에게로. 순례의 길을 가는 동방박사들을 바라보며, 공동합의적 교회, 여정중인 교회로써, 하느님이 사람 안에 계시고, 사람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 베들레헴으로 우리는 가야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첫 번째 자리에 앉으셔서 경배를 받으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그분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은 모든 분류와 분류를 넘어 형제애로 합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경배하고, 가난하고, 형제애적인 교회가 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성가정, 목동들, 동방박사,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여주는 성탄의 복음에 순명하여 우리는 그곳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인생 자체가 순례이기 때문에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밤에 빛이 켜졌으니 우리 스스로 깨어나야 합니다. 부드러운 빛, 우리가 비천함 속에서 사랑받는 아들과 딸, 빛의 자녀(1테살 5,5 참조.)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함께 기뻐합시다. 오늘 밤부터 우리 세상에 밝게 비추시는 예수님의 빛, 이 빛을 아무도 끄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21/documents/20211224-omelia-natale.html
영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1/documents/20211224-omelia-natale.html